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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 롤. 롤. 계정삭제.

드디어 롤을 삭제했다. 계정을 삭제했다. 삭제해야지 삭제해야지 말로만 수십번 삭제하기 직전까지 수번을 거듭했는데 이번엔 진짜 삭제했다. 

 

롤과 나의 악연은 대략 11년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중학교 1학년이던 나는 친구들과 친해지는 과정에서 롤을 접했다. 당시 pc방 가격이 900원, 1000원이던 때 롤은 정말 재밌었다. 당시 PC게임이라고는 메이플밖에 모르던 내가 (그마저도 30렙까지밖에 못찍었었다) 롤은 정말이지 엄청 재밌었다. 친구들과 매일매일 학교 끝나고 PC방을 가면서 레벨을 차근차근 올리고 친구들과 뽀글이도 먹으면서 게임만 했다. 정말이지 재밌었다. 롤에 접속하면 친구들이 좌르륵 뜨는데 온라인인 친구들에게 ㅎㅇ를 보내는게 뭔가 문화였다. 귀여운 추억이다.

 

롤백과사전이라는 어플도 깔아서 챔피언 스토리, 스킬, 스킨이 뭐가 있고 이 챔피언의 베스트 공략들을 보면서 지식을 쌓아갔다. 그렇게 나는 롤에 푹 빠졌다.

 

중고딩 때 친구들과 PC방에 가는 일들이 잦아졌다. 성인인 된 나는 재수할 때를 빼고 롤만 했던 것 같다. 얼마나 롤에 시간을 낭비했는지 알려주는 사이트에 가보니 정말 어마어마한 숫자가 있었다. 정확한 시간이 부끄러우니 말할 수 없지만 책을 543권이나 읽을 수 있는 시간이랜다. 롤할 시간에 외국어 하나를 읽혔더라면 자격증 공부를 했더라면 이라는 생각이 머리를 쿵 치고 갔다.

 

내 나이 25살인데 방에서 게임만 하고 나아지지 않는 기분이 수도 없이 들었다. 그 중간에 떡하니 버티고 있는게 이 리그오브레전드 라는 생각이 들었다. 게임을 이겨도 시시하고 지면 너무 화가 나고 그렇다고 해서 엄청 잘하는 것도 아닌 상위 15~20%에 머물러 있는 평범한 롤 유저였다.

 

매번 화가 나서 롤을 지울까 말까를 수십번 고민했다. 매번 그럴듯한 핑계를 대면서 아냐 롤은 못지우겠어. 롤 재밌잖아. 이걸로라도 스트레스를 풀어야지. 롤 지우면 내 인간관계는 어떡해?(엄청 높은 티어를 달성하면 인기가 많아질 것이라는 망상을 했다) 나중에 여자친구 생기면 같이 롤하고 싶어했잖아 너. 라는 그럴듯하다고 믿는 실은 전혀 그럴듯하지 않는 핑계들로 나를 보호했다. 

 

내가 내 자신을 방치하면서까지 롤을 대변하고 있는 모습에 이건 진짜 악마의 게임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기분이 드는 순간 아 이거 지금 아니면 삭제 못한다. 악마의 속삭임에서 잠시 나를 벗어나 있었을 때 지금 삭제해야한다는 생각이 몹시 솟구쳤다. 악마를 이겨내고 싶었다. 결국 이겨냈다. 

 

그러나 악마는 이겨냈지만 이젠 나 자신과의 약속을 지켜야할 때다. 이게 얼마나 오래갈까 결국 다시 하게 되지 않을까와 같은 온갖 번뇌들이 나를 괴롭힌다. 중독과 관련된 책을 보니 4주 정도는 참고 견뎌야 한단다. 방법이 없다. 그저 견딜 수 밖에 없다. 

 

근데 확실한 건 도피처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나의 할 일들로 부터 도망칠 수 있는 대피소가 사라졌다. 이제 현실을 더 이상 회피하지 말고 그저 관망하자. 나아가자라는 말은 못하겠다. 그저 지켜볼 수 밖에 없을 것 같다.